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 영어 (문단 편집) === '교육'의 시작 === ||참고: [[홍콩 반환]] 이전의 학제는 [[영국 학제|영국식 학제]]로 6년제 primary school (小學) → 7년제[* 단, 이는 [[대학]]에 진학할 경우이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을시엔 5년제. Secondary school의 마지막 2년은 일종의 [[대학예과|대학예비과정]]이었다. 현재는 중+고 통합 6년제.] secondary school (中學) → 3년제[* 현재는 [[한국]]과 동일하게 4년제.] university (大學) 식의 체계를 따른다. 그러므로 저 세 단계를 각각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이라 칭하며, 각 단계에 해당하는 교육 기관을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라 칭한다. || ||__수업 과목이 무엇인지에는 상관없이__, '[[학교]]의 거의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경우 그냥 '영강'이라 칭하며[* 그러니까 '[[영미권]] 학교는 영강' 이런 개념.], 상대적인 개념으로 '학교의 거의 모든 수업을 중국어([[광동어]])로 진행'하는 경우는 '중강'이라 칭한다. || 홍콩의 교육은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홍콩 최초의 '[[교육기관]]'은 [[1851년]]에 세워진 St Paul's College이며, 이후 [[1862년]]에 정부 주도로 Central School이라는 또다른 교육 기관이 설립된다. 학교의 운영은 선교사들과 정부가 공동으로 하였다. '무엇을 가르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서양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반이 되었다. '동양적인 것을 서양에 전파하는 것'을 추구하는 서양인들에 있어 가장 흔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언어'였으며, 이럼으로서 '[[관화]]'는 물론이오 중국 남방 방언인 '[[광동어]]'가 자연스레 주목받았고, 중국 고문헌을 영어로 번역하는 식의 교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식민지 종주국이 [[식민지]]에 행하는 "교육"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일부 극단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널리 퍼지고 발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로빈슨 총독(1891-8)이 '55년만 지나면 [[홍콩인]]들은 모조리 영국화될 거임'이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참고로 19세기 당시에는 효율적인 [[외국어]] 교육 방식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던 만큼 수십 년 간 대부분의 수업은 중강이 기본이었으며, 영강이 보편화된 것은 1891년 Central School이 Queen's College로 개명하며 [[영강]]을 활성화한 이후이다. 그 수십 년간 광동어-영어 [[번역]]을 하느라 수많은 수고가 들어갔음은 자명하다. 1912년에는 홍콩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자 영강을 기본으로 하는 [[홍콩대학]]이 설립되었다. 반면 이후 1963년에 설립된 [[홍콩중문대학]]은 중강을 기본으로 하도록 했다. 홍콩중문대학의 설립으로 식민지 정부는 '중강은 [[모국어]]라 상대적으로 학업하기 수월하다는 점에서 선호할 테고, 당연히 중강하는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유리할 테니까, 중강하는 중등학교에 많이 들어가겠지?'라고 기대했지만, [[대학 입시]]에는 영어가 필수였던고로 중등교육을 영강으로 받은 학생들[* 광동어는 모국어라 변별력이 떨어지니, 상대적으로 영어에 유리한 게 곧 입시 상위권으로 직결되니까...]이 중문대에도 잘만 들어가는 탓에 영강의 중등학교을 선호했지, 중강의 중등학교를 선호할 이유가 없었던 탓에 후자는 [[1963년]]부터 [[제적]]이 다소 줄어들었다. ~~[[정시]]위주의 폐해~~ 1974년에는 [[영어]]와 [[중국어]][* 현재 홍콩 정부처럼 무슨 방언이 표준인지는 명확히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상 [[광동어]]가 표준이었다.]가 드디어 홍콩의 공식적인 공용어(조계 예외)로서 자리잡았으나 여전히 영강학교가 선호 대상이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영국 식민지일 뿐더러 [[염정공서]] 설립으로 인해 삶의 질이 점점 향상되는 시기였긴 했으나, [[영국인]]들과 본토인들의 격차가 꽤 있었기 때문에 '잘 살려면 영어를 잘 해야지'라는 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대해 정부 [[관료]]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모국어의 상실 및 그로 인한 [[정체성]] 희석'을 우려하였으며, 1982년에는 [[영국]], [[미국]], [[호주]]와 [[뉴질랜드]]의 교육 전문가들과 모여서 '모국어를 기본으로 쓰되, 영어를 제1외국어로 쓰도록 가르치자'는 절충안을 내놓기도 할 정도. 그런데 정부는 정작 영강/중강 택일의 문제를 '학교장 자율'에 맡겼기 때문에 절대다수는 영강을 택했다. 위에 서술했다시피 영어 점수 잘 따야 더 유리하니까... 덕분에 교실에서는 광동어와 영어를 자연스레 섞어 쓰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홍콩 영어를 형성시킨 근원이기도 하다. 1990년에 [[교육청]]에서 '중강과 영강의 비율은 7:3이 적합하다'고 제시했지만, 현실은 초등학교의 90% 이상은 중강을 택하고 반대로 중등학교의 90% 초과는 영강을 택한다는 매우 기형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사실 중등학교 대부분은 '[[교과서]]는 원서를 쓰고 시험도 영어로 내지만, 실제 수업은 광동어로 하며 영광(영어 → 광동어)번역하는 식으로 교육하는' 편법을 썼다. ~~어디선가 많이 본 거 같은데...~~ 홍콩 반환 직전, 식민정부는 '이제 영강/중강 여부는 학교장 선택제에서 지정제로 바꾸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에 따라 460군데 남짓하는 [[중등교육기관]] 중 '100군데만 영강이고 나머지는 중강이다'라며 교육체계를 대폭 조정했다. 영어사대주의가 사회에 만연했던 당시 사회상으로 인해[* 지금도 홍콩에는 영어사대주의가 다소 남아 있다.], 이러한 조치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정부는 영강을 100군데에서 114군데로 상향해주는 것으로 시민들을 달랬다. 다만 정부의 의도가 '[[보통화]]에 맞서 우리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광동어를 지켜야 한다'였다는 점에서 비추어보면 결과적으로는 좋을지도...? 어쨌거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홍콩의 '''"두 가지 글말, 세 가지 입말"'''(兩文三語)[* 두 글말은 영어와 중국어, 세 입말은 영어와 보통화, 광동어를 말한다. 광동어를 쓰는 사람도 대부분 격식을 갖춰야 하는 글은 북경어 [[백화문]]에서 유래한 어휘와 [[문법]] 양식을 따르므로 보통화와 거의 같다.]정책의 근간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